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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효성물산의 무연탄 수입 성공으로 열기 고조
‘중국과의 교역규모 100억달러 돌파.’
지난 2004년 교역 규모 579억달러로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교역 1위 국가로 올라선 현재와 비교해 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100억달러를 돌파한 1993년 당시 100억달러가 보여준 상징적인 의미는 매우 컸다.
이 해는 중국이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교역상대국으로 확실히 자리 잡는 해였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간접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 1979년 이후 14년 만에, 그리고 양국간 교역규모가 10억달러를 넘어선 1985년 이후 8년만에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방 분위기 타고 간접교역으로 시작
당시 우리나라의 미국과 EC(유럽공동체) 등 선진국들에 대한 수출이 크게 위축되고 있고 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가 확산되고 있었다. 우리 기업인들은 이같은 추세에 발맞춰 수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이란 기대를 갖고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동구권 시장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 기업들이 빈손으로 되돌아 왔다. 내수 위주의 경제정책에 따른 수출의 상대적 위축과 신규시장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자칫 수출 성장점이 사라지지 않는가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의 교역확대는 우리 무역업계에 유일한 활력소로 작용했다. 어떻게 보면 한·중 양국간 교역확대는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 등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중 교역 성장의 배후에는 동구권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숱한 사연들이 깔려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간접교역에 본격 착수한 것은 지난 1979년부터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이란 전형적인 중국식 논리를 앞세워 1978년말 개방정책을 선언했고 이듬해부터 선전을 중국 경제특구 1호로 지정해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의 개방 분위기를 틈타 효성물산은 홍콩 중개상을 통해 1979년 1월 중국매탄진출공사로부터 무연탄을 수입, 석탄공사에 공급했다. 당시 만해도 가정용 연료로 연탄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정부는 연탄 제조용 무연탄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효성물산이 중국산 무연탄 수입에 성공하자 석탄공사는 운송비 면에서 미국산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중국산 무연탄 수입을 크게 늘렸다.
설순옥 전 효성물산 해외법인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중국산 무연탄을 싣기 위해 입항하면 중국 항만당국은 항해일지를 일일이 점검했다. 당시 한국의 선일상선 선박을 장기 용선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온 선박이 곧바로 중국산 무연탄 운송에 투입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때문에 선박의 항해일지를 조작해 한국항에 입항한 사실을 모두 숨겼다. 무연탄 수입을 계기로 1979년 9월 중국에 처음으로 남해화학의 비료도 수출했고 컬러TV브라운관, 자전거와 승용차용 타이어코드 등의 제품을 중국에 처음 수출한 것도 당시의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연탄 수입을 계기로 홍콩을 중개지로 한 중국과의 간접교역은 열기를 더해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은 원산지가 대만인 상품을 가장 선호했기 때문에 홍콩중개상들 사이에선 대만 원산 지증명 가짜서류가 판을 쳤고 홍콩의 무역상들 사이에서 중국내 실력자와 어떤 형태로건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이미 이 때 부터 시작됐다.
84년 기점으로 민간 비공식 접촉 확대
중국은 1980년 들어 해안지역 거점도시들을 중심으로 개방 폭을 확대해갔고 1984년을 기점으로 한국기업인들과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비공식 접촉도 확대했다.
그해 2월 한국의 재벌기업 총수로는 처음으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또 4개월 후인 6월에는 제3국 국적 한국 상사원에게 중국방문 상용비자가 발급되기 시작했고 1985년 4월부터 홍콩주재 한국상사원에게도 상용비자가가 허용됐다. 이어 1991년 1월 베이징에 우리나라 무역대표부가 공식 개설될 때까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90북경아시안게임 등 스포츠를 통한 교류에다정부간, 경제단체간, 민간 기업인간, 그리고 중국교포의 모국방문 등 양국간 인적교류는 밀물처럼 이어졌다.
재벌 총수로 초기 중국시장 진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김우중 회장은 1984년 이후 10년간 31차례나 중국을 방문했고 천진환 럭키금성상사 사장도 1984년 미국 시민권으로 처음 중국에 들어간 이후 1994년까지 105차례나 중국을 방문, 당시 기업인 가운데 중국방문 최다 횟수를 기록했다. 1985년 삼성물산과 대우는 제3국 국적의 교포들을 채용, 홍콩 현지법인의 자회사나 지사형태로 북경에 처음 사무소를 열었고 그 밖의 기업들도 여러 가지 형태로 중국내에 연락사무소를 두기 시작했다.
KOREA 표기 때문에 전시참가 못해
코트라(KOTRA)가 추진한 중국과의 무역사무소 교환개설 협상과정을 보면 당시 양국의 정부간 공식관계 수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코트라는 1984년 8월 흑룡강성 대외무역청 산하 기관인 개발무역총공사의 박두성 총경리가 친지 방문차 우리나라에 왔을 때 흑룡강성과 피아노합작공장 설립 및 중국산 한약재 수입을 추진했다. 피아노합작공장 설립의 한국측 파트너로는 삼익악기가 결정됐고 합작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흑룡강성측과 빈번한 교류가 이뤄졌다. 그러나 코트라는 1986년 홍콩무역관을 중심으로 난징무역전시회 참가를 추진했다가 전시회 개막 하루 전에 좌절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중국 교섭의 첫 쓴잔을 마셔야 했다.
홍콩무역관은 우리업체 10여개로 첫 중국무역전시회 참가단을 구성했고 KOREA(한국)란 명칭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채 전시회 참가를 위해 난징에 들어갔으나 난징세관의 전시물품 통관검사 과정에서 선전서류에 찍힌 ‘Korea Trade Center’의 ‘Korea’란 명칭이 문제돼 전시참여가 불허됐다. 비록 우회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최초의 중국내 무역전시회 참가 시도는 이렇게 해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났다.
‘중국과의 교역규모 100억달러 돌파.’
지난 2004년 교역 규모 579억달러로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교역 1위 국가로 올라선 현재와 비교해 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100억달러를 돌파한 1993년 당시 100억달러가 보여준 상징적인 의미는 매우 컸다.
이 해는 중국이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교역상대국으로 확실히 자리 잡는 해였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간접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 1979년 이후 14년 만에, 그리고 양국간 교역규모가 10억달러를 넘어선 1985년 이후 8년만에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방 분위기 타고 간접교역으로 시작
당시 우리나라의 미국과 EC(유럽공동체) 등 선진국들에 대한 수출이 크게 위축되고 있고 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가 확산되고 있었다. 우리 기업인들은 이같은 추세에 발맞춰 수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이란 기대를 갖고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동구권 시장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 기업들이 빈손으로 되돌아 왔다. 내수 위주의 경제정책에 따른 수출의 상대적 위축과 신규시장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자칫 수출 성장점이 사라지지 않는가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의 교역확대는 우리 무역업계에 유일한 활력소로 작용했다. 어떻게 보면 한·중 양국간 교역확대는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 등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중 교역 성장의 배후에는 동구권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숱한 사연들이 깔려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간접교역에 본격 착수한 것은 지난 1979년부터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이란 전형적인 중국식 논리를 앞세워 1978년말 개방정책을 선언했고 이듬해부터 선전을 중국 경제특구 1호로 지정해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의 개방 분위기를 틈타 효성물산은 홍콩 중개상을 통해 1979년 1월 중국매탄진출공사로부터 무연탄을 수입, 석탄공사에 공급했다. 당시 만해도 가정용 연료로 연탄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정부는 연탄 제조용 무연탄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효성물산이 중국산 무연탄 수입에 성공하자 석탄공사는 운송비 면에서 미국산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중국산 무연탄 수입을 크게 늘렸다.
설순옥 전 효성물산 해외법인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중국산 무연탄을 싣기 위해 입항하면 중국 항만당국은 항해일지를 일일이 점검했다. 당시 한국의 선일상선 선박을 장기 용선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온 선박이 곧바로 중국산 무연탄 운송에 투입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때문에 선박의 항해일지를 조작해 한국항에 입항한 사실을 모두 숨겼다. 무연탄 수입을 계기로 1979년 9월 중국에 처음으로 남해화학의 비료도 수출했고 컬러TV브라운관, 자전거와 승용차용 타이어코드 등의 제품을 중국에 처음 수출한 것도 당시의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연탄 수입을 계기로 홍콩을 중개지로 한 중국과의 간접교역은 열기를 더해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은 원산지가 대만인 상품을 가장 선호했기 때문에 홍콩중개상들 사이에선 대만 원산 지증명 가짜서류가 판을 쳤고 홍콩의 무역상들 사이에서 중국내 실력자와 어떤 형태로건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이미 이 때 부터 시작됐다.
84년 기점으로 민간 비공식 접촉 확대
중국은 1980년 들어 해안지역 거점도시들을 중심으로 개방 폭을 확대해갔고 1984년을 기점으로 한국기업인들과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비공식 접촉도 확대했다.
그해 2월 한국의 재벌기업 총수로는 처음으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또 4개월 후인 6월에는 제3국 국적 한국 상사원에게 중국방문 상용비자가 발급되기 시작했고 1985년 4월부터 홍콩주재 한국상사원에게도 상용비자가가 허용됐다. 이어 1991년 1월 베이징에 우리나라 무역대표부가 공식 개설될 때까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90북경아시안게임 등 스포츠를 통한 교류에다정부간, 경제단체간, 민간 기업인간, 그리고 중국교포의 모국방문 등 양국간 인적교류는 밀물처럼 이어졌다.
재벌 총수로 초기 중국시장 진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김우중 회장은 1984년 이후 10년간 31차례나 중국을 방문했고 천진환 럭키금성상사 사장도 1984년 미국 시민권으로 처음 중국에 들어간 이후 1994년까지 105차례나 중국을 방문, 당시 기업인 가운데 중국방문 최다 횟수를 기록했다. 1985년 삼성물산과 대우는 제3국 국적의 교포들을 채용, 홍콩 현지법인의 자회사나 지사형태로 북경에 처음 사무소를 열었고 그 밖의 기업들도 여러 가지 형태로 중국내에 연락사무소를 두기 시작했다.
KOREA 표기 때문에 전시참가 못해
코트라(KOTRA)가 추진한 중국과의 무역사무소 교환개설 협상과정을 보면 당시 양국의 정부간 공식관계 수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코트라는 1984년 8월 흑룡강성 대외무역청 산하 기관인 개발무역총공사의 박두성 총경리가 친지 방문차 우리나라에 왔을 때 흑룡강성과 피아노합작공장 설립 및 중국산 한약재 수입을 추진했다. 피아노합작공장 설립의 한국측 파트너로는 삼익악기가 결정됐고 합작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흑룡강성측과 빈번한 교류가 이뤄졌다. 그러나 코트라는 1986년 홍콩무역관을 중심으로 난징무역전시회 참가를 추진했다가 전시회 개막 하루 전에 좌절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중국 교섭의 첫 쓴잔을 마셔야 했다.
홍콩무역관은 우리업체 10여개로 첫 중국무역전시회 참가단을 구성했고 KOREA(한국)란 명칭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채 전시회 참가를 위해 난징에 들어갔으나 난징세관의 전시물품 통관검사 과정에서 선전서류에 찍힌 ‘Korea Trade Center’의 ‘Korea’란 명칭이 문제돼 전시참여가 불허됐다. 비록 우회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최초의 중국내 무역전시회 참가 시도는 이렇게 해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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